원래의 순수한 본성으로 찾아가는 과정..
한번 난장판으로 잘 놀아봄으로써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명상으로 차분해진 우리는 누구랄 것 없이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다들 치유와 감사를 느꼈으며
허그를 통해 사랑을 교류했다.
그래 ‘사랑이야’ 모두가 원하고
이 삶 속에서의 위로 받을 수 있는건..
진한 공감대가 형성 된 것 같았다.
O명상을 하며
졸졸졸 떨어지는 끊임 없는 물소리가
마치 잉태된 태아가 어머니의 뱃속에서
양분이 이동하는 소리 같았다.
생명을 받아 유지하기 위해
우리도 물을 받아 생명유지 되듯이
둘 사이의 유기성이 불현듯 떠올랐으며
마치 어머니 자궁 속의 나처럼 편안하고
고요한 무념 무상의 명상이었다.
절체조
요가와 명상은 단순히 육체적 운동과
연관된 명상이라고만 알고 있었고
익숙한 숫자만의 체조라고 생각했었다.몸의 원리 절체조의 필요성을
다시 배우며 이 또한 수련이란 걸 알았다.
횟수에만 급급하여 진정한 절체조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모르던 것을 알게되었다.하나하나 동작의 정체되고 느린 몸에 새기고
정신에 새기는 수련이었던 것이다.
수업도중 얼마나 겉의 가짜 인생에
익숙히 살았는가를 여실히 느끼며
내 몸에게 매우 미안하고
또 지금껏 지탱해줌에 고마워 눈물이 나왔다.
진정한 절체조를 할 것 같아 내 마음을 울리는 절체조였다.
세상의 많은 경험과 관념 속에 갇혀
살아온 날들 속에서도
늘 목마름 그 실체를 알고 싶었다.
직, 간접의 경험과 머리에만 의존한 작은 허용치로
진주 알들만 모으느라 급급한 삶이었고
지식에 대한 허영심과 우월감으로도
진주 목걸이는 만들어지지 않았다.
why? 언제나 왜?
무엇을 더 알아내야 이 허전함 배가 부를 것인가?
히딩크 말처럼 난 왜(늘) 배고픈가?
로움을 만나며 엉킨 실들이 풀어지는 실마리를 얻은 것 같다.
리탐빌은 진주를 꿰일 줄을 갖고 있나 보다.
나은 여정 더욱 스스로에게 깊이 들어가
함께 진주 목걸이를 만들어 보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