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브라함 링컨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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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라함 링컨의 “리더십 4章”
에이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 1809-1865)이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다?
미국 일리노이주 스프링필드에 세워져 얼마 전 개관한 링컨기념관에 가면
다시 환생한 것 같은 링컨을 만날 수 있다. 다름 아니라 25년 동안 1억 4천 5백만 달러를 들여 지은 링컨기념관이 개관하면서 특수효과를 통해 링컨의 모습을 3차원적으로 재현해낸 것이다. 새로 개관한 링컨기념관에는
이 밖에도 링컨 재임시절의 2층 짜리 백악관과 링컨이 암살당한 포드 극장의 좌석도 똑같이 만들어 놓았다.
에이브라함 링컨은 1809년 미국 켄터키주(州) 호젠빌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지만 잡화점 경영, 측량기사, 우체국장 등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독학으로 법률공부를 해 변호사가 되었다. 그리고 1837년 일리노이주의 스프링필드에서 법률사무소를 개업하였다.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되어 1861년 워싱턴으로 떠나기 전까지 20년 넘게 일리노이주의 주도(州道)인 스프링필드에서 살았다.
스프링필드에는 링컨이 산 이층집뿐만 아니라 링컨 가족이 다녔던 교회,
그리고 링컨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다.
새로 링컨 기념관이 스프링필드에 문을 연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다.
<링컨의 리더십 Lincoln on Leadership>을 쓴 도널드 필립스(Donald T. Phillips)의 말처럼, 링컨은 그 자체가 살아있는 리더십의 교과서이다.
그렇다면, 링컨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일까?
첫째, 현장의 리더십이다.
링컨은 대통령으로 재직한 4년 동안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백악관이 아니라 전쟁터에서 보냈다. 링컨의 아들 윌리가 죽었던 1862년 2월과 그 자신이 가벼운 천연두에 걸렸던 1863년 12월에서 그 이듬해 1월까지를 제외하고 링컨은 거의 백악관에 머물지 않았다. 그는 직접 전선을 두루 돌면서 전황을 살폈고, 병원이든 개인집이든 가리지 않고 부상병들을 찾아 위문했다. 그래서
“병사들이 있는 곳에 링컨이 있다.”는 말이 생길 정도다고 한다.
그만큼 그는 책상머리에 앉아 있는 리더가 아니라 직접 현장을 발로 뛰며 확인하는 리더였던 것이다.
둘째, 인재우선의 리더십이다.
링컨이 육군성 장관으로 임명한 에드윈 맥마스터 스탠턴은 한 때 링컨보다 훨씬 유명한 변호사였다. 그래서 스탠턴은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대통령을 얕보고 그에 대해 경멸적인 언사를 그치지 않았다. 하지만 링컨은 에드윈 스탠턴이 육군성 장관에 최적임이라고 판단하고 과감하게 그를 등용했다.
링컨의 판단은 적중했다. 스탠턴은 임명 된지 채 몇 개월도 안되어 육군성을 민첩하고 유능한 조직으로 전면개편해내고 말았다. 더구나 링컨은 육군성에서 올라온 결재서류에 대해서는 육군성 장관 스탠턴의 서명이 있는가만 확인했다. 스탠턴의 서명만 있다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링컨이 이렇게 하자, 불평불만을 퍼나르던 스탠턴의 링컨을 대하는 태도 역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스탠턴은 완전히 링컨의 사람이 되었다.
1865년 4월 9일 링컨이 리버퀸호를 타고 워싱턴으로 돌아왔을 때 그를
맨 먼저 포옹하며 남군의 리장군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알려준 사람도 다름 아닌 스탠턴이었고, 링컨이 암살당했을 때, “이제 그는 시대를 초월한 인물이 되었다”고 말한 사람 역시 스탠턴이었다.
결국, 링컨은 최고의 인재를 찾는데 몰두했던 것이다.
“아울러 의심하면 쓰지 않되, 일단 쓰면 의심하지 않는다.”는 말을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셋째, 혁신의 리더십이다.
링컨이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두 동강이 난 미국을 다시 하나로 봉합했으며 노예해방과 미국민주주의의 상징적 인물임을 모를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에이브라함 링컨이 미국 역대 대통령 중 유일하게 특허권을 획득한 대통령이었음을 아는 분은 그리 많지 않을 듯 하다.
마흔 살 나던 1849년에 에이브라함 링컨은 좌초한 배의 부력을 높임으로써 배를 물밑에서 끌어내는 방식으로 특허를 따냈다.
그 후 대통령이 되어 워싱턴에 입성한 다음에도 링컨의 혁신적 아이디어 창출에 관한 호기심과 열정은 가실 줄 몰랐다. 그는 말 그대로 혁신의 리더였던 것이다.
넷째, 희망의 리더십이다.
사실 링컨의 일생은 실패와 패배의 연속이었다.
스물 세살 때 주의원 선거에서 패배하고,
스물 아홉 살 때 주의회 대변인에 출마해 졌다.
서른 한살 때 정·부통령 선거위원에 출마해 패배하고,
서른 네살 때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마흔 살 때 연방 하원의원 선거에서 재선을 노렸지만 패배했고,
마흔 다섯 살 때 상원의원 선거에 도전했지만 실패했다.
그리고 마흔 일곱 살 땐 부통령 지명전에 나섰다가 패했고,
마흔 아홉 살 땐 상원의원 선거에서 또 패배하는 등
링컨의 삶은 실패와 패배의 연속이었지만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오히려 패배를 패배시키며 한 걸음 한 걸음 다시 나아갔던 것이다.
그가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희망의 사람이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더구나 링컨은 네살 때 여동생이 죽었으며,
아홉 살 때는 어머니를 잃었다.
또 생전에 두 아들을 먼저 저 세상으로 떠나 보내야 했다.
하지만 링컨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원망하거나 절망하지 않다.
그는 삶의 밝은 면을 보았다. 그는 진정한 희망의 리더였던 것이다.
리더 자신이 희망을 잃으면 주변은 어느새 절망이 만연하게 된다.
그래서 리더는 끊임없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어야 한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링컨은 140여 년 전에 이미 저 세상 사람이 되었지만
그는 아직도 우리 안에 살아 있다.
우리 마음과 정신 속에 리더십의 영원한 화신으로 말이다.
<출처 : WWW. SERICEO.ORG 감성리더십 中, 글 : 정진홍 >
◆ 콘텐츠名 :「에이브라함 링컨의 리더십 4章」
작성자 : SA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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