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아름다운 사람

 

박찬호가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나?

( 아 ~ 관리자님 지우지 말아주세요 ^ ^ )

오릭스에서의 방출이 사실상 결정난 박찬호 선수는 이대로 가다가는 국내복귀마저 무산되며 더이상 선수생활을 이어가지 못할 위기에 처해있습니다. 고향팀 한화 이글스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구단이 박찬호 선수의 복귀 자체와 복귀 방식에 대한 합의가 이뤄지지 않고있습니다.

“1픽을 사용해야한다” “국내 복귀 자체가 불가능한 선수다” “FA선수다” 등 많은 의견이 있지만, 그 무엇도 박찬호 선수의 국내 복귀 자체를 너그러이 혹은 대승적으로 받아들이는 의견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동안 박찬호 선수가 한국야구에 기여했던 모습을 생각하면 이러한 이기적이고 좀스러운 모습들은 아쉽기만 합니다.

한국야구선수 최초로 MLB에 가서 그저 그런 선수가 아닌 최고 반열의 선발투수로 뛰었고 월드시리즈까지 뛰어 본 선수, 그리고 한국야구 국가대항전에서 언제나 중요한 역할을 하며 이승엽, 이병규 선수와 함께 “병역 브로커”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박찬호 선수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냉담한 한국야구계의 이기적인 반응을 보여주기에는 그에게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듭니다.

본인 역시 답답한 마음에 한국시리즈 4차전이 열린 문학구장에 찾아 “한국서 뛰고싶다”라는 의견을 파악하고 지인들에게 답답한 마음과 아쉬움을 토로하고있는데요.

한국야구계가 대승적 차원에서 많은 공로를 한 박찬호 선수의 한국야구 입성을 도와야 하지 않을까요?

[사진 = 박찬호 ⓒ 엑스포츠뉴스 DB]

뭐든지 협회가 문제

000

이상한거에 대승적차원 들이대지마라.
찬호형 만큼 대승적인 차원을 적용해야 하는 일이 또 있나.
찬호형은 특별하다.
예외 라는 단어로 예외지을 수 없을만큼 특별하다.
그냥 형이 원하는 대로 하게 해라.

000

어떤 룰이던지 예외는 있는법이다 ㅡㅡ 객관적으로 박찬호는 FA자격이 있고 그렇게 해줘야한다 제발 윗대가리들 돈이나 권력 위신과 체면 이런거 땜시 영웅을 찬밥취급하지말자 제발 좀 ㅡㅡ 한화도 적극적으로 다른구단들도 적극적으로 KBO 쑤레기도 좀 적극적으로 제발 좀

000

돈때문이라다라는 거는 진짜 개소린게. 이미 박사장은 돈 안벌어도 어차피 부인도 어마어마한 재력가고 본인 스스로 번 돈이 상상초월이다.
돈 안벌어도 평생을 아주 풍족하게 먹고도 훨 남을 만큼 재력이 있는 상태에서 돈때매 선수생활한다는 거는 진짜 개소리고. 그냥 선수생활 더 하고 싶은거겠지.

000

찬호박에게는 정말 예외의 경우를 둬도 좋다고 생각하는데?? 현역중에 대한민국 야구에 박찬호만한 경험을 가진 인물이 있던가?? 어느 팀을 가건 가겠지만 박찬호의 경험이 그 팀에 녹아들면 그야말로, 한국야구 전체에 좋을 일일텐데
규정 들먹이며, 복귀못하게 막는 이유가 뭔지 도무지 모르겠다.

000

돈때문이라는 놈들은 뭐냐
에휴 대한민국 영웅 박찬호가 이런 어린놈들 한테 이런 소리나 듣고..
진짜 내가 고등학교때만 해도 찬호형 던지는거 매일 생중계 해주고 그랬는데..
진짜 우리나라에 큰 공헌 한 선수인건 인정해야한다.
그리고 와서 힘들다고 무너질 정도의 멘탈을 가진 선수였다면
이미 10년전에 무너졌을꺼다
진짜 박찬호 메이저리그 갔을때부터 지켜봤던 1인으로 제발.. 중고딩들아
요새 최근 몇년간의 박찬호를 보고 판단하지 말거라
아시아 최고 메이저 리그 승수는 향후 100년간은 안나올 대기록인거 몰라?
에휴…. 진짜 마음이 아프다 아파

000

박찬호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멋지게 삼진을 날리는 모습을
다시한번 보고싶습니다.
좋은 소식 있기를 바랍니다.
코리안특급 박찬호 화이팅~

000

설령 한화로 오지 않는다해도 무조건 국내로 복귀해야하는거 아닌가???
무슨 제약이고 뭐고 규율이고 어째서 이렇게들 구시대적 생각들만 하고계신건지……. 19살 프로 초년병도 아니고 프로만 어언 20년이 다되가는 분한테 참…

000

흥행을 위해서라도 과감한 정책을 사용해야죠…..
팬들을 위한 야군데…..메이져리그에서 뛰던 선수가 한국야구 에
온다는게 가당키나 하냐……진짜 있을까 말까한 일을 이뤄줘야함

000

imf때 박찬호의 야구를 보면서 일상의 즐거움을 느꼈었던 사람이라면 그런말을 하면안되지. 메이저리그에서 자신한테 중요한시기인데도 다 제쳐두고 나라를위해 뛰었던 사람인데. 메이저리그 최고의위치에 있었지만 항상 조국을 먼저 생각했던사람인데 이런 대접을 하나

000

찬호박의 실력이 무서워라기보다 그의 스타성을 견제하는 것이겠지.

000


작성자 : 야구사랑 -퍼온글

전체글

[postlist id=36484]

이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내면의 소리를 따르십시오

내면의 소리를 따르십시오

내면의 소리를 따르십시오

 

 

세계 IT업계의 흐름을 바꿔놓은 스티브 잡스 애플 전 최고경영자가 56년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1976년 스티브 워즈니악과 함께 부모님의 집 창고에서 애플컴퓨터를 창업한 후 아이폰4에 이르기까지 혁신의 삶을 살아온 잡스의 사망에 IT업계는 물론 전 세계가 애도의 듯을 표하고 있다.

애플은 이날 공식 발표를 통해 “잡스의 사망에 유감을 표한다”며 “스티브는 탁월하고 열정적이고 에너지감 넘쳤고, 무수한 혁신을 이룬 인물이었고, 우리 삶을 풍부하게 해주는데 큰 공헌을 했다”고 입장을 밝혔다.

잡스의 삶은 늘 ‘오늘이 마지막’인 것 같은 삶이었다. 이는 그가 2005년 스탠퍼드 대학교 졸업식 축사에서 했던 연설을 통해 잘 드러났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저는 제 자신에게 늘 이렇게 묻곤 했습니다.

만약 오늘이 내 생애 마지막 날이라면, 나는 과연 오늘 하려는 일을 하고 싶어할까?’
그리고 너무 여러 날 동안 계속해서 아니오 라는 대답이 나오면, 그때는 뭔가 달라져야 할 필요가 있을 깨닫곤 했습니다.

여러분의 시간은 한정돼 있습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의 인생을 사느라 자기 자신의 시간을 허비하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이 생각하는 결과에 맞춰 살아야 한다는 도그마에 빠지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들이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에 파묻혀, 여러분 내면의 소리를 잃지 마십시오.

용기를 갖고 여러분의 마음과 직관을 따라가십시오. 여러분의 마음은 스스로가 진정 무엇이 되고 싶은지 이미 알고 있습니다.”

[퍼온글]


작성자 : 스티브잡스

전체글

[postlist id=36484]

이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

스티브 잡스..

 

 

“곧 죽을 거란 사실을 기억하는 것은 인생에서 커다란 선택을 내리는 데 도움을 주는 가장 중요한 도구입니다. 외부의 기대, 자부심, 좌절과 실패 등은 모두 죽음 앞에서 덧없이 사라지고, 진정으로 중요한 것만 남기 때문입니다.”

“아무도 죽길 원하지 않는다. 천국에 가고 싶다는 사람조차 죽어서 가고 싶지 않다”며 “그래도 죽음은 우리 모두의 숙명이다. 아무도 피할 수 없다. 그래야 한다. 왜냐하면 삶이 만든 최고의 발명이 “죽음”이기 때문이다”고 강조했다.


작성자 : 애플

전체글

[postlist id=36484]

이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손가락

손가락

손가락

 

 

내가 결혼 전 간호사로 일할 때의 일이다.
아침에 출근해 보니 아직 진료가 시작되기에

이른 시간이었음에도 25살 남짓 되어 보이는

젊은 아가씨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아주머니가

두 손을 꼭 마주잡고 병원 문 앞에 서있었다.

아마도 모녀인 듯 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아주머니! 아직 진료 시작되려면

좀 있어야 하는데요. 선생님도 아직 안오셨구요.”

” ….. ”

” ….. ”

 

내 말에 두 모녀가 기다리겠다는 표정으로

말없이 마주 보았다.

 

 

업무 시작 준비를 하는 동안에도

두 모녀는 맞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작은 소리로 얘기를 주고받기도 했고,

엄마가 딸의 손을 쓰다듬으면서 긴장된,

그러나 따뜻한 미소를 보내며 위로하고있었다.

 

잠시 후 원장선생님이 오시고,

나는 두 모녀를 진료실로 안내했다.

 

진료실로 들어온 아주머니는

원장님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얘..얘가…제 딸아이예요.

예..옛날에..그니까…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외가에 놀러갔다가

농기구에 다쳐서 왼손 손가락을 모두 잘렸어요…
다행이 네 손가락은 접합수술에 성공했지만…

근데…네…네 번째 손가락만은 그러질 못했네요…
다음달에 우리 딸이 시집을 가게 됐어요.

사위 될 녀석은 그래도 괜찮다고 하지만…

그래도 어디 그런가요.. 이 못난 에미…
보잘 것 없고 어린 마음에 상처 많이 줬지만

그래도 결혼반지 끼울 손가락 주고 싶은 게

이 못난 에미의 바램이예요.

그래서 말인데 늙고 못생긴 손이지만

제 손가락으로 접합수술이 가능한지…….. ”

 

그 순간 딸도 나도 그리고 원장선생님도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원장님은 흐르는 눈물을 닦을 생각도 못한 채

“그럼요..가능합니다. 예쁘게 수술 할 수 있습니다.”

라고 했고 그 말을 들은 두 모녀와 나도

눈물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송암 제공-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것이다.


작성자 : 민태홍

전체글

[postlist id=36484]

이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엄마 모습

엄마 모습

엄마 모습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 모습

시장 통에서 찐빵과 만두를 만들어 파는 어머니를 소개합니다.

일요일 오후, 아침부터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후둑후둑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비는 한 시간이 지나고 두 시간이 지나도 그치기는커녕
빗발이 점점 더 굵어지기만 했습니다.

어머니는 서둘러 가게를 정리한 뒤 우산 두 개를 들고 문을 나섭니다.
곧 바로 딸의 미술학원 앞으로 달려간 어머니는
학원 문을 열려다 말고 잠시 주춤 했습니다.
작업복에 낡은 슬리퍼, 앞치마엔 밀가루 반죽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모습을 보고 혹시라도 감수성 예민한 여고생 딸이
상처를 입을까 걱정된 어머니는 건물 아래층에서 딸이 끝나길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한참을 기다리던 어머니가 문득 3층 학원 창가를 올려다봤을 때,
마침 어머니를 내려다보고 있던 딸과 눈이 마주쳤습니다.

어머니는 반갑게 손짓을 했지만 딸은 못 본 척 얼른 몸을 숨겼다가
다시 삐죽 고개를 내밀고, 숨겼다가 얼굴을 내밀곤 할 뿐이 었습니다.

딸은 초라한 엄마가 기다리는 걸 원치 않는 것 같았습니다.
슬픔에 잠긴 어머니는 고개를 숙인 채 그냥 돌아섰습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어머니는 딸의 미술학원에서 학생들의 작품을
전시한다는 초대장을 받았습니다.
딸이 부끄러워할 것만 같아 한나절을 망설이던
어머니는 다 늦은 저녁에야 이웃집에 잠시 가게를 맡긴 뒤
부랴부랴 딸의 미술학원으로 갔습니다.

“끝나 버렸으면 어쩌지…”

다행히 전시장 문은 열려 있었습니다.

벽에 걸린 그림들을 하나하나 보던 어머니는
한 그림 앞에서 그만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엄마의 모습”
비, 우산, 밀가루 반죽이 허옇게 묻은 앞치마,
그리고 낡은 신발.
그림 속엔 어머니가 학원 앞에서 딸을 기다리던 날의
초라한 모습이 고스란히 들어 있었습니다.

그날 딸은 창문 뒤에 숨어서 우산을 들고 서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화폭에 담고 가슴에 담았던 것입니다.

어느새 어머니 곁으로 다가온 딸이 곁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모녀는 그 그림을 오래 오래 바라보았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모습으로…
– 남천 제공-


작성자 : 민태홍

전체글

[postlist id=36484]

이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어머니 생각만해도 눈물이 납니다

저는 5월 8일 어버이날에 지방에 계신 어머니께 다녀왔습니다.

그 다음날은 생신이시기도 해서 미리 8일에는 아무런 상담을 받지 않도록 하고 새벽같이 떠났습니다. 얼마전 어머니께서 검사를 받으셨는데 파키슨병이라는 병명을 받게 되셨거든요. 참으로 마음이 아프고 어머니의 병명을 제가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으니 본인은 더 하셨겠지요.

 

몇 년 점부터 손을 조금씩 떨기 시작하셨는데 저와 가족은 모두 어머니의 지병인 당뇨의 합병증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매해 하시는 검진이나 자주 가시는 병원에서도 다른 말슴이 없어서… 당뇨 관리만 잘 하시길 바랐거든요. 4~5년 전부터 어머니와 함께 식사를 하면 손을 좀 떠시고… 시간이 가면서 어느 날 젓가락 사용을 줄이시고 가끔은 손으로 음식을 집어 드셔서 속으로 속상하단 생각을 했었거든요.

 

어머니는 저희가 어릴 적부터 식탁의 예절을 따끔하게 가르쳐주시던 분이셨기에 더 이상했지요.

“엄마. 왜 젓가락 사용을 안 하시고… 손으로 하세요?”라고 해 본 적이 있었는데 그럴때면 어머니는 “글쎄다. 자꾸 손이 떨려서 음식이 제대로 안 집어져서 그래…”라고 하셨지요.

지금 그런 말을 했던 제 자신이 너무 후회되고 어머니의 몸 상태를 헤아리지 못하고 자존심을 건드린 것 같아 마음이 아픕니다.

 

8일에는 어머니가 병원에서 외출 허럭을 받고 1박 2일 나오셨습니다.

어머니가 병원에서 오시기 전에 가족 모두 모였습니다.

마침 외삼촌과 이모네 가족 까지 다 와 주었습니다.

오랜만에 손주들이 다 온 모습에 좋아하시면서 한명씩 안아 주셨습니다.

아니 저희가 안아드렸지요. 어머니의 떨리는 손과 몸이 안타까워 더 꽉 안아 드렸습니다.

 

가족들이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저는 누워 계신 엄마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지요. 엄마의 겨속적으로 덜덜 떨리는 손을 꼭 쥐고 함께 누워서 엄마 눈을 바라보며 이야기 했습니다.

“엄마… 지금 무슨 생각해?”

“글쎄. 아무 생각도 없어.”

“엄마. 지금까지 사시면서 제일 행복했을 때가 언제야?”

“나? 글쎄… 30대? 40대?… 그 다음은 그냥 정신없이 살았던 것 같다… 니 아부지 병나시고 그 병 수발 하느라… 벙신없었어.”

 

“엄마 지금 어디 가고 싶은데 있어?”

“아니… 없어… 그냥 잘 죽어야 할 텐데. 너희들 고생 시키지 않고…”

“엄마… 무슨 고민이나 걱정이 남아 있는 게 있으세요?”

“없어… 아니다. 있다. 두 아들들이 걱정이지…  니 오빠는 지금 그대로 그냥 살아도 될 것 같고… 막내 태현아빠가 늘 걱정이지. 잘 안 풀려서. 내가 죽기 전에 잘 되는 것 보고 가야하는데….

 

“엄마… 이번에 알게 된 병 받아들이기 힘들지?”

“그래 왜 내가 이런 병에 걸렸는지 모르겠다. 이렇게 손이 떨리고 흔들거리고 천천히  걸으려고 마음먹어도 몸이 앞으로 쏠리면서 막 앞으로 급하게 가는 거야…….”

“엄마… 미안해.  엄마가 전에 손을 떨 때 내가 잘 알아차리고 뇌 검사를 했어야 했는데 왜 지금까지 그 생각을 못했는지 모르겠어.”

“…….”

“엄마, 그래도 요즘엔 좋은 약이 많으니까 포기하지 마.”

엄마는 더 이상 아무 말 안하셨어요. 엄마의 눈을 들여다보니 아버지가 반했던 그 예쁘던 눈이 이제는 초점도 없이 멍한 힘없는 눈이 되어 버리셨어요. 저희 엄마 눈은 정말 예쁜 눈이었거든요.

 

그날 밤 저는 엄마랑 함께 잠을 잤습니다.

주무시기 전에 보행이 불편하신 어머니는 방문을 열고 엉금엉금 기어서 이방 저방 모여서 자는 가족들을 한명씩 다 들여다보시더라고요.

다음 날 아침에는 딸들이 저마다 어머니가 한 번만이라도 더 드셨으면하는 마음으로 해온 음식들과 밑반찬들로 상을 차려 드렸습니다. 두 세 수저 드시곤 이내 수저를 내려 놓으셨습니다.

조금 만 더 드시라고 해도 고개를 살살 흔드시며 뒤로 물러나시더니 마당을 내다 보셨습니다.

 

저희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시고 꽃 밭 가꾸시길 매일 기도처럼 하셨는데 병원에 입원하신 몇 달 동안 썰렁했던 마당에 잠깐 외출을 나오신 엄마를 위해 오빠가 마당 가득히 꽃을 심어 놨더라고요.

이쁜 팬지며 베고니아를 앞마당에 가득히 심어 놓은 것을 보시곤 좋아하셨어요. 어머니가 가꾸시던 마당엔 할미꽃과 며느리밥풀 꽃이라는 꽃이 아름답게 피어있었어요. 뒤마당의 벚꽃이 지는 것을 보시고는 저에게 “언젠가 수녀가 얻어 다 준 벚나무가 이리 컸구나 재작년엔 세 알… 작년엔 다섯 알 달렸었는데 올핸 몇개나 달릴까?” 하시네요.

 

서양 버찌가 달리는나무여서 어렵게 얻어다 어머니 마당에 심어 드릴 때 너무 좋아하셨던 모습이 생각났습니다.

떠나올 땐 모두 어머니를 한 번씩 꼭 안아 드렸습니다. 참 자그마하시고 몸이 얇다는 생각에 엄마랑 눈을 마주칠 수 없어 엄마 볼에 제 볼을 갖다 대었습니다.

모든 손주들도 어쩌면 직장 생활에 할머니랑 마지막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눈시울을 붉히며 할머니, 외할머니를 안아드렸습니다.

 

매일 밤 9시에는 모두가 어머니를 기억하며 기도하자고 약속들을 하면서 형제들이 헤어졌습니다.

어머니.

이 단어만 불러도 눈물이 나지요.

더 잘해 드릴 걸.

왜 젓가락으로 안 드시고 손으로 드시나요… 그 말을 주워 담을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철없이 엄마 마음을 아프세 했던 말들을 다 담아 올 수만 있다면 좋겠습니다.

 

 

이 곳에서 아이들을 만나면서 어머니의 사랑을 제가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사랑을 더 많이 느꼈습니다.

그래서 가끔은 엄마에게 전화해서 “엄마. 고마워. 엄마. 감사해…”

그랬는데 그런 전화라도 계속 드릴 수 있는 엄마.

어머니가 좀 더 오래 계섰으면 하는 마음이 가득합니다.

저는 이번 5월 어버이날 1박 2일을 이렇게 보냈습니다.

 

그리고 지난 번 어느 모임에 갔을 때 잠깐 옆 자리에서 보여주신 노인들에 관한 자료와 물건들을 찍은 사진 중 노인들이 사용하시는 수저가 생각이 났습니다.

약간 안쯕으로 휘어져서 나오는…

그래서 노인들이 좀 더 수월하게 음식을 드실 수 있도록 디자인 된 수저 사진이 생각났습니다. 늦은 감이 있지만 구해서 어머니께 보내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사햡니다.

 

직원이 조직의 한 부문에서 일을 하면서 그 역할의 중요함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오케스트라 공년 중 심벌즈의 역할은 계속 연주하지는 않지만 중요한 시점에서 박자를 놓치면 그 연주 전체를 망치게 한다.

 

도전하는 자는 아름답습니다. 도전하는 젊음은 아름답습니다. 도전과 응전, 이것은 젊음의 특권입니다. 젊고 늙음은 나이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신의 나이가 많아도 생각이 젊으면 젊은이요, 육신의 나이가 젊어도 생각이 늙었으면 노인일 것입니다.

 


작성자 : 민태홍

전체글

[postlist id=36484]

이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 advertisement